중국 공장의 구매 결정을 미국·영국 본사가 관장하는 글로벌 고객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용건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통화 내내 경쟁사 이름과 오퍼 가격을 직접 말하지 않았고, 연락한 이유도 돌려 말했습니다. 제가 상대해온 중국 고객 다수는 어디 제품을 쓰고 있고 얼마여야 살 수 있다며 경쟁사 오퍼까지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편이었기에, 이 담당자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오히려 중요한 단서로 읽혔습니다. 구매 결정권이 현지가 아닌 본사에 있다는 구조를 떠올리니, 이 담당자에게는 중국 시장 정보에 대한 니즈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식 거래로 이어가야 하는 단계였기에 첫 접점에서 쌓는 신뢰가 특히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시간을 들여 대화를 이어가며 상대가 신중하고 비즈니스 매너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경쟁사와의 가격 차이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내부에서 검토할 근거를 찾고 있다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현지에 있지 않은 구매 담당자였기에, 윗선에 결재와 보고를 올릴 때 중국 시장 상황을 직접 설명할 재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경쟁사 정보를 먼저 묻지 않고 기다린 것도 이 판단에서 비롯됐습니다.
저는 가격을 방어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희 제품은 가격을 앞세우는 포지션이 아니고, 안정적인 공급과 납기 준수는 기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수입사로서 줄 수 있는 차별점은 글로벌 시장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 고객에게는 중국 시장 정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부 검토에 필요한 세부 정보가 필요하신 것 같은데 맞다면 제가 정리해 드리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캐묻기보다 확인만 구하는 것이 이 담당자의 방식에 맞는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상대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밝아지며 감사 인사를 건넸습니다. 설득이 아닌 도움을 제안했을 때 비로소 상대가 마음을 열었다고 느꼈습니다.
사업계획 수립과 마감이 겹쳐 발송이 다소 늦어졌지만, 약속한 자료는 반드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 정리를 마쳤습니다. 먼저 중동 정세와 원유·정제유 수출 규제 등 공급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이때 수출 금지로 알려진 내용도 실제로는 허가 미발급이었던 것처럼, 확정된 사실과 미확정 보도를 구분해 표현했습니다. 다음으로 원재료 변화가 원가로 이어지는 흐름을 설명했습니다. 특히 중국 프로필렌 시장가가 전쟁 이후 최고점을 넘어섰다는 점, 그리고 중국 원료 가격 상승 속도가 전쟁이 막 시작되었던 때와 달리 오히려 가파르다는 점을 전달해 지금의 원가부담이 일시적 변동이 아니라 7월부터 누적된 결과라는 차이를 전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요 공급사들의 연이은 가격 인상 공지를 시장 변화로 묶어, 인상 전 가격으로 받은 타사 견적은 현재 수준을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결론이 담당자 스스로의 판단으로 이어지도록 구성했습니다.
자료를 만들 때 두 가지를 주안점으로 두고 작성했습니다. 첫째, 담당자가 윗선에 보고할 때 그대로 인용할 수 있도록 공급, 원가, 시장 순으로 항목을 나누고 수치마다 기준을 명확히 적었습니다. 둘째, 저희에게 유리한 내용만 고르지 않고 시장의 실제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되, 바이어가 가격 협상에 역이용할 수 있는 표현은 다시 검토해 덜어냈습니다. 신뢰를 얻으려면 정보의 정확성과 균형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입장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8월부터 오른 원재료 부담을 자체적으로 흡수해 왔고 해상 운임까지 오르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조정만 협의하고 있다는 점을 투명하게 밝혔습니다. 가격을 올리는 쪽의 사정을 솔직히 공개해야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시장 환경에 대한 공통의 이해에서 대화가 시작된다고 판단했습니다.
현재 메일을 발송했고 내부 검토 결과를 기다리는 단계입니다. 아직 거래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정리한 분석 틀은 다른 고객과의 가격 협의에도 응용할 수 있도록 남겨두었고, 이 경험으로 설득은 상대의 판단 구조에 맞춰 근거를 만들어 주는 일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말투와 망설임까지 단서로 읽고, 가격을 관철하기보다 상대가 내부에서 설득할 수 있는 재료를 건네는 방식이 장기적인 신뢰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같은 정보라도 누가 어떤 맥락에서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점도 체감했습니다. 시황 뉴스를 아는 것과 그것을 고객의 보고서 한 줄로 쓰일 수 있게 가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역량이었습니다. 이번 일에서 남은건, 고객에게 필요한 것은 설득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재료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