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거래처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화물 통관이 늦어지면서 발생한 부대비용을, 전혀 다른 건의 화물 대금에서 그냥 차감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금액 자체보다, "일단 통보하고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방식이 당혹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장기 거래처였던 만큼, 이런 방식으로 문제가 불거지는 게 더 씁쓸했습니다.

처음엔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억울하다는 감정이 앞서니, 곧바로 "저희 책임이 아닙니다"라고 답장부터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감정보다 팩트가 먼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단 답장을 미뤄두고 그동안 오간 메일과 일정을 하나씩 다시 정리해 봤습니다. 도착 예정일은 미리 통보했고, 서류 발송 주소 확인 요청에 대한 회신이 늦었던 것도 저희 쪽이 아니었고, 무료 보관 기간도 요청받은 대로 이미 최대한 연장해 드렸다는 것까지 확인됐습니다. 국제 거래 관행상 항구 도착 이후 통관과 인수 책임은 수입자에게 있다는 원칙도 저희 편이었고요. 근거는 명확했지만, 딱 한 군데 걸리는 지점이 있었어요. 최근 대리점을 거치던 거래 방식을 직거래로 막 전환한 참이라, 새로 생긴 공장 담당자 쪽으로는 서류 전달 창구가 아직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던 겁니다. 저희는 기존에 확인받은 창구로 정확히 통지를 보냈지만, 그 정보가 새 담당자에게까지 전달됐는지는 저희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상대가 이 지점을 파고들면, "통지 의무를 다했다"는 저희 주장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약점은 굳이 먼저 꺼내지 않되, 상대가 짚었을 때 발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는 분명히 인지해두었습니다.

근거를 다 모아놓고 보니, 이걸 무기 삼아 상대를 몰아붙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누구 잘못이냐"를 끝까지 따지는 싸움이 될 뿐, 문제가 빨리 풀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번 소통 공백은 어느 한쪽의 실수라기보다, 거래 방식이 바뀌는 전환기에 창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해 생긴 구조적인 문제라고 정리해서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앞으로는 어느 담당자에게 서류와 일정을 보내면 되는지 명확히 확정해서,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창구를 정리했습니다. 문제를 덮으려는 게 아니라, 재발을 막을 장치를 만드는 데 이 갈등을 활용한 셈입니다. 금액이 적지 않았던 만큼, 내부적으로는 상황을 미리 공유해 두고 진행했습니다. 협상 결과를 나중에 승인받아야 할 때, 처음부터 공유돼 있던 사안과 갑자기 튀어나온 사안은 반응이 완전히 다르니까요.

비용 문제는 "지금 당장 누가 부담하느냐"로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번 비용을 즉시 차감하는 게 아니라, 다음 분기 단가 협상 때 함께 반영하는 방향으로 제안했습니다. 지금 이 건에서 억지로 승패를 가리기보다, 앞으로 계속 이어갈 거래 안에서 자연스럽게 풀어가자는 취지였어요. 당장 눈앞의 대금을 지키는 것보다, 다음 협상 테이블에서 서로 부담 없이 마주 앉을 수 있는 관계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거래처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대금도 원래 조건대로 정리했습니다. 

사실 이 과정에서 답답한 순간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다섯 가지 근거를 들어 우리 책임이 아님을 회신하고 난 뒤에, 사실 거래처에서 돌아올 답이 훤히 보였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며 본질을 흐리는 소모전이 지속될게 눈에 선했어요. 실제로 담당자는 참조 메일로 이미 통지를 받았고, 다른 담당자들에게도 서류가 나가 있었습니다. 자재 요청에 맞게 선적했음에도,  한 달 넘게 화물을 찾아가지 않은 것도 고객사 쪽이었고, 내부적으로 정보가 안 갔다는 걸 저보다 먼저 알았을 사람은 오히려 그쪽이었을 텐데 (져는 전체 참조라인을 다 알 수 없었으니까요). 하나하나 짚고 억울한 마음도 구구절절 풀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제 억울함 풀어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어요. 

시시비비를 끝가지 가려서 이긴다 해도, 판매자 입장에서 남는 건 하등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건을 팔면서 옳고 그름을 따져 이겨봤자, 선례를 남기지 않는다는 성취는 남길지 몰라도 물건사고 기분 나쁜 '인상'은 진하게 남아 앞으로 거래에 영향을 끼쳤겠죠. 그래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다행히 팀장님도 같은 판단이셨고, 덕분에 방향을 정하고 밀어붙이는 데 속도가 붙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가장 빨리 해결될 때 관련된 사람들의 소모가 가장 적어진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