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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0년 가까이 대리점을 통해 판매해 오던 거래선이 있었습니다. 그 대리점을 직접 일군 사장님도 이제 은퇴를 앞두고 계셨어요. 현지 출장도 잘 안 가시고, 저희와 고객 사이를 그저 가격이면 가격, 물량이면 물량만 전달하는 앵무새 같은 역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거래선이 이미 경쟁사 저가 제품을 병행 사용하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물량은 적으면서 최저가만 고집했고, 저희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견적을 내도 늘 경쟁사보다 비쌌습니다. 가격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대리점에 쇄신을 요청했습니다. 거래선의 재무제표, 경쟁사 사용 현황, 실제 니즈부터 파악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몇 주가 지나도 돌아오는 답은 늘 비슷했습니다. "가격을 더 낮춰달라고만 하네요."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대리점만 믿고 기다렸다가는 몇 년째 반복된 가격 싸움만 계속될 것 같아서, 직접 출장길에 올랐습니다.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이 거래선은 중국과 동남아에 생산 거점을 둔 꽤 큰 글로벌 회사였고, 원래는 미국산 제품을 주로 써왔더라고요. 그런데 미중 무역전쟁으로 덤핑 관세가 붙으면서 중국 반입 물량에 큰 관세를 맞게 됐고, 새로운 공급처가 필요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코로나 시기라 물성 검증을 하려면 현지에서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공급사가 유리했는데, 마침 경쟁사 하나가 박사급 기술 전문가를 팀 단위로 파견해 "원하는 물성이 나올 때까지 개발해 주겠다"라고 나섰던 이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특수 그레이드를 만들어 납품받고 있었고, 동남아 라인에서 쓰는 미국산 제품도 최소 주문 수량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없는 구조였어요. 대리점 사장님이 몇 년째 몰랐던 이 배경을, 저는 담당자와 마주 앉아 한나절 만에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왜 진작 이런 대화를 하지 못했을까 싶어 조금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보였습니다. 이미 굳어진 두 개의 라인은 어차피 바꿀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저희 제품만 쓸 수 있는 생산 라인이 그 안에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지점이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가격이 아니라 이 라인에 집중해서 관계를 다시 짜야겠다는 확신이 그때 섰습니다.

미팅 한 번으로 이 구조를 파악하고 나니, 대리점 사장님을 설득하는 건 오히려 쉬웠습니다. "제가 계속 말씀드렸던 대리점의 역할이 바로 이런 거였습니다"라고 했더니, 평소에 힘든 내색을 여과없이 드러내셨던 분이 아무 말도 안 하시더라고요. 암묵적으로 설득이 되어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내부적으로 이 거래선에 대한 대리점 자격 종료가 검토되고 있고, 결과는 다음 주 안에 통보하겠다고 전했습니다. 평소라면 이에 대해 반발하셨을 분인데도, 그때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시더라고요. 그날 사장님은 앞으로 물려줄 요량으로 따님을 데리고 나오셨던 자리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안타까운 자리가 되어 저도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인지 그 자리를 마치고 나오면서, 홀가분함보다는 씁쓸함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그렇게 대리점 자격을 종료하고 직거래로 전환하며 거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실 직거래는 손이 훨씬 많이 가는데요. 시스템도 새로 맞춰야 하고, 효율만 놓고 보면 대리점을 거치던 때보다 나을 것도 없었습니다. 익숙했던 구조를 뒤로 하고, 물류와 결제 조건 하나하나를 처음부터 다시 세팅해야 했고, 그렇다고 단기간에 점유율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구조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있는 자리를 잘 지키면서, 더 잘 관리할 수 있는 접점을 계속 찾고 기회를 탐색하는 것 — 그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이 거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리점이든 직거래든, 결국 중요한 건 거래선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라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현장에 있다는 것도요. 전달받은 정보만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궁금해하며 파고들어야 진짜 이해가 된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새로운 거래선을 만나면, 가격 얘기보다 그 회사의 사업 구조부터 이해하려는 태도가 생겼습니다.